유진 피터슨은 그의 묵상집 "솔로"를 통해 Lectio Divina의 네 단계를 소개하며, 성경을 단순한 공부가 아닌 경험으로 접근할 것을 강조한다. 그는 성경을 읽고(Read), 묵상하고(Think), 기도하며(Pray), 삶에 적용(Live)하는 과정을 통해 하나님과의 깊은 교제를 추구한다. 피터슨은 성경을 읽는 것이 곧 하나님과의 대면이며, 이를 통해 자신의 본 모습을 발견하고,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 것이 중요하다고 설명한다. 그는 기도를 통해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성경 말씀을 기도의 내용으로 삼아야 한다고 강조한다. 마지막으로, "관조 또는 조명" 단계에서 말씀을 삶에 적용하여 실천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말한다.
🗺️ Knowledge Map
- 유진 피터슨의 Lectio Divina
- 성경을 경험하는 방법
- 네 단계: Read, Think, Pray, Live
- 성경을 통해 하나님과 대면
- 기도에서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 것의 중요성
- 성경 말씀을 기도의 내용으로 삼기
- 말씀을 삶에 적용하여 실천하는 중요성
22. 유진 피터슨의 "Lectio Divina
그런가하면 Lectio Divina를 통해서 깊은 영성을 추구하고 있는 장로교 목사도 있습니다. 영성 운동가로 잘 알려진 유진 피터슨(Eugine Peterson)입니다. 그가 번역한 성경 "The Message"는 이미 기독교계에 베스트셀러가 되었고 또한 그의 다른 책 "솔로(Solo)" 역시 많은 사람들이 애용하고 있습니다. "일대일" 즉 "하나님 앞에 선 단독자"란 의미의 "솔로"는 일 년 동안 매일 말씀을 묵상할 수 있도록 만든 묵상집입니다. 피터슨은 Lectio Divina에 근거해서 묵상집 "솔로"를 만들었다고 서두에서 언급하고 있습니다. 피터슨이 설명하는 Lectio Divina는 성경공부라기 보다는 성경을 경험하는 방법이라고 합니다. 즉 Lectio Divina는 성경 속으로 들어가서 성경을 묵상하는 법, 하나님과 친밀하게 대화하는 법, 더 나아가서 하나님의 말씀으로 세상을 살아가는 법을 가르쳐준다고 하지요.
Lectio Divina(렉찌오 디비나)는 어떤 교리나 가르침이 아니라 800여 년 전에 기독교 내에 있었던 성경 묵상 방법입니다. 지금부터는 Lectio Divina를 적용해서 영성을 개발시킨 장로교 목사 유진 피터슨을 소개하려고 합니다. 그의 묵상집 "Solo"를 보면 중세 수도사 구이고(Guigo II)가 제시한 Lectio Divina의 네 단계를 그대로 받아들여 소개하고 있습니다. 구이고의 독서(Lectio)를 피터슨 목사는 Read로, 묵상(Meditatio)을 Think로, 기도(Oratio)를 Pray로, 관조 또는 조명(Contemplatio)를 Live로 번역해서 사용하고 있습니다. 그가 설명하고 있는 Lectio Divina 방법을 소개하려고 합니다.
피터슨 목사는 성경이란 에덴의 어둠에서 천국의 영원에 이르기까지 하나님께서 그의 백성을 사랑하는 이야기라고 합니다. 과거 어느 한 시절에 그의 백성들에게 주셨던 말씀만을 기록해놓은 책이 아니라 앞으로도 영원토록 그의 사랑하는 백성들에게 주실 말씀을 담고 있는 책이라는 말이지요. 그러고 보면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함으로 하나님의 백성이 된 우리들에게 주실 이야기도 그 책 안에 들어 있는 셈이지요. 우리에게도 말씀을 해주실 사랑의 하나님이 그 책 안에 계신 것입니다. 그래서 피터슨 목사는 성경을 깊이 읽으면 성경 안에 계신 하나님을 대면할 수 있다고 합니다. 내가 하나님과 대면하게 되면 나의 본래 모습이 드러나게 되지요. 성경을 통해서 나 자신의 본 모습을 보게 된다는 말입니다. 이런 점에서 피터슨 목사는 우리가 성경을 읽을 때에 성경은 우리를 읽고 있는 특별한 책이라고 말합니다. 성경을 읽으면 읽을수록 나 자신에 대해서 더 알게 되고 또한 나를 창조하신 하나님에 대해 더욱 깊이 알게 되는 것이지요. 성경은 그와 같이 특별한 책이기 때문에 특별한 방법으로 읽어야 된다고 말합니다. 성경 한 구절 한 구절을 천천히 신중하게 읽어야 합니다. 또한 주의를 기울여 하나님 말씀에만 집중해야 합니다. 특별히 순전한 믿음을 가지고 몇 번이고 반복해서 읽어야 합니다. 이것이 피터슨 목사가 설명하는 "독서(Lectio)" 방법입니다.
다음 단계는 성경 본문 속으로 들어가서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 것입니다. 본문 속으로 들어가려면 먼저 마음을 비워야 한다고 말합니다. 본문을 통해서 내가 이런 음성은 꼭 들어야 되겠다는 생각을 버려야 합니다. 또한 본문에 대한 선입견도 버려야 합니다. 본문에 대해서 지금까지 알고 있었던 것, 다른 사람들이 본문에 대해서 말했던 것, 내가 본문에 관해 배웠던 것조차 다 버려야 합니다. 더 중요한 것은 본문을 틀리게 해석할 것 같은 두려움도 버려야 한다고 말합니다. 깨끗하게 빈 마음으로 본문 속으로 들어가야 하나님의 음성을 들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사실 인간의 마음은 잡음으로 가득 차 있습니다. 당장 해결해야 할 문제들이 재촉하는 소리, 감정의 바다에서 일어나는 소리, 다른 사람의 입에서 전달된 소문 등 여러 가지 시끄러운 소음들 속에서 하나님의 음성을 가려낸다는 것은 여간 어렵지 않지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마음을 비우고 본문 말씀에 집중하고 그 말씀을 반복해서 생각하다보면 하나님 말씀이 묘한 의미를 가지고 있다는 것을 발견하게 되지요. 특히 한 말씀 한 말씀을 깊이 생각하다보면 오늘따라 특별하게, 중요하게, 강력하게 내게 다가오는 본문 속으로 들어가게 되고 거기서 나에게 의미를 부여하시는 하나님의 음성을 듣게 됩니다. 이것이 피터슨 목사가 말하는 "묵상(Meditatio)" 방법입니다.
피터슨 목사가 Lectio Divina(렉찌오 디비나)의 세 번째 단계인 "기도(Oratio)"에서 강조하는 것이 두 가지 있습니다. 첫째는 듣는 것입니다. 둘째는 읽은 말씀을 기도에 넣는 것입니다. 여기서는 지면상 첫째 강조만 설명합니다.
기도는 하나님과 대화하는 것이라고 알고 있습니다. "대화"라고 함은 말하기도 하고 듣기도하는 것이지요. 그런데 우리의 기도를 보면 거의가 일방적으로 내가 말하는 것에 치우쳐 있습니다. 대화가 정상적으로 이루어지기 위해서는 말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상대방의 말을 듣는 것도 매우 중요하지요. 기도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기도에서 내가 하는 말도 중요하지만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 것이 매우 중요합니다. 말하는 것에만 익숙해진 우리에게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다는 것은 좀처럼 쉬운 일은 아닙니다. 하나님의 음성을 들으려면 마음의 귀, 영혼의 귀가 열려 있어야 하지요. 예수님도 "들을 귀 있는 자는 들으라"고 말씀하고 계시지요(막 4:23). 귀를 열어놓고 하나님께서 나에게 말씀하시는 음성에 귀를 기울여야 합니다. 무릎을 꿇고 눈을 감는다는 기도의 형식이 중요한 것은 아닙니다. 찬양하면서도, 춤을 추면서도 기도 즉 하나님과 대화할 수 있습니다. 형식이야 어떻든 내 마음이 하나님을 향해 열리면 하나님과 대화할 수 있는 상황이 된 것이며 또한 마음의 귀가 열리면 하나님의 음성에 들을 수 있는 조건을 갖춘 것이지요.
하나님 음성은 귀가 열린 사람의 상태 또는 상황에 따라 다르게 들리지요. 예를 들면, 성경에 "도적질하지 말찌니라"(출20:15)란 말씀이 있습니다. 이 말씀을 마음에 품고 기도해보세요. 평생 동안 남의 물건을 도둑질해본 적이 없는 사람에게 이 말씀은 윤리적 도덕적으로 좋은 가르침 즉 "교훈의 음성"으로 들립니다. 그런데 현재 도둑질하고 있는 사람에게 이 말씀은 죄를 꾸짖는 "책망의 음성"으로 들립니다. 또한 죄책감으로 인해 도둑질을 그만두어야 한다는 생각을 하고 있는 사람에게 이 말씀은 깨끗한 생활을 하라는 "바르게 하는 음성"으로 들립니다. 또한 도둑질하며 살았던 적은 있지만 지금은 손을 씻고 깨끗한 생활을 하고 있는 사람에게 이 말씀은 도적질과 같은 죄로부터 계속 멀리하게 하는 "의로 교육하는 음성"으로 들립니다. 같은 한 말씀인데 듣는 사람에 따라 다른 음성으로 들리게 됩니다. 그래서 성경말씀은 진리이지요. 바울은 위와 같은 하나님의 음성을 다음과 같이 정리했습니다. "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 것으로 '교훈'과 '책망'과 '바르게 함'과 '의로 교육하기'에 유익하니"(딤후 3:16).
그러면 하나님께서 그런 음성을 들려주시는 목적이 무엇이겠습니까? 그 목적은 디모데후서 3:17절에 "하나님의 사람으로 온전케 하며 모든 선한 일을 행하기에 온전케 하려 함이니라"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하나님은 마음이 열리고 그의 음성에 귀를 기울이는 사람을 "선한 일을 행하는 온전한 하나님의 사람"으로 세우려고 하시지요. 즉 어두운 세상을 밝게 만들고, 더러운 세상을 깨끗하게 만들고, 악한 세상을 선하게 변화시키는 최고로 아름다운 사람으로 세우기 위해서 당신의 음성을 들려주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조종하거나 이용하려는 분이 아니고 오히려 우리를 사랑하시는 분입니다. 그래서 피터슨 목사는 기도할 때 그분의 음성에 귀를 기울여야 한다고 강조하는 것입니다.
피터슨 목사가 Lectio Divina(렉찌오 디비나)의 세 번째 단계인 "기도(Oratio)"에서 강조하는 "하나님의 음성에 귀를 기울이는 기도"에 관해서는 지난번에 말씀드렸습니다. 여기서는 피터슨 목사가 기도할 때 두 번째로 강조한 것을 설명합니다. 그것은 다름 아닌 Lectio Divina에서 읽은 하나님 말씀을 기도 내용으로 삼으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기도할 때에 우리 자신의 생각대로 기도합니다. 때로는 하나님의 의도와 상관없이 우리가 원하는 것을 기도의 내용에 넣곤 합니다. 그러다가 하나님께서 내가 원하는 대로 응답해주지 않으면 이내 좌절하곤 합니다. 기도를 하나님과의 대화라고 했으면 대화의 주도권은 사실 하나님에게 있어야 하는 것이지요. 그런데 내가 대화의 주도권을 잡고 하나님을 내 뜻대로 이용하려는 것이 우리 기도의 특징입니다. 기도가 제대로 되려면 대화의 주도권을 하나님께 넘겨드려야 합니다. 기도 안에서 하나님이 말씀하시도록 해야 하는 것이지요. 그렇게 하려면 하나님의 말씀이 기도의 중심이 되어야 합니다.
기독교 신앙의 확고한 기초는 하나님 말씀인 성경입니다. 기독교인이면 누구나 하나님께서 성경을 통하여 우리에게 말씀하신다고 믿지요. 그래서 Lectio Divina에서 하는 기도는 성경에 기초해서 드리는 기도가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성경읽기(Lectio)를 통해서 읽은 성경 본문이 기도(Oratio)의 내용이 되어야 한다는 말입니다. 하나님 말씀 속에는 하나님의 뜻이 들어 있지요. 읽은 성경 본문이 나의 기도의 내용이 된다는 것은 내 기도가 하나님의 뜻과 일치하고 있다는 것을 말해주는 것입니다. 그런 기도를 통해 나의 삶이 변화되었다면 그것은 곧 내 생활이 하나님의 말씀과 일치하고 있다는 것을 확인시켜주는 것입니다. 이렇게 하나님의 뜻과 내 뜻이 일치된 것을 "하나님과의 진정한 교제"라고 할 수 있지요.
피터슨은 성경 본문 가운데 이해가 안 되는 것들이 있다면 그것도 기도로 하나님께 말씀드리라고 권합니다. 하나님께 깨닫게 해달라고 구하라는 것입니다. 모르면 무조건 주석에 눈을 돌리거나 남의 설명에 귀를 기울이려는 현대인들에게 주는 충고입니다. 그 말씀을 마음에 품고 기도를 통해 하나님의 음성에 귀를 기울이면 지혜의 하나님께서 나에게 깨달음을 주시지요. 나를 "선한 일을 행하는 온전한 하나님의 사람"으로 세우려는 하나님께서 침묵하시고 계시겠습니까? 어두운 세상을 밝게 만들기를 원하시고, 더러운 세상을 깨끗하게 정화시키기를 원하시며, 악한 세상을 선하게 변화시키기 원하시는 하나님께서 가만히 계시겠습니까? 하나님은 절대로 우리를 조종하거나 이용하려는 분이 아니라고 피터슨 목사는 말합니다. 오히려 우리를 사랑하시는 분이기 때문에 그분의 음성에 귀를 기울이면 나에게 가장 적절한 깨달음을 주시지요.
근본적으로 Lectio Divina에서 "기도"라고 하는 것은 어떤 "신비적인 초월 명상"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성경 말씀을 가지고 하는 기도가 본래 Lectio Divina의 세 번째 단계인 Oratio(오라찌오)였던 것입니다. 유진 피터슨 목사는 800여 년 전에 수도사 구이고(Guigo II)가 제시한 Lectio Divina를 제대로 이해한 사람입니다. 피터슨 목사가 설명한대로 기도는 내 말만 쏟아 붓는 일방적 대화가 아니라 하나님의 음성도 들을 줄 아는 정상적인 대화가 되어야 하며, 더 나가서 대화의 주도권은 하나님 즉 하나님 말씀에 있어야 합니다.
마지막 단계인 "관조 또는 조명"(Contemplatio)에 대해서 소개하려고 합니다. 영어 단어 "Contemplation"의 어원이 되는 라틴어 "Contemplatio(콘템플라찌오)를 피터슨 목사는 "Live"로 번역해서 사용하고 있습니다. 본래 Lectio Divina에서 명사로 되어 있던 네 단계를 피터슨 목사는 모두 동사로 바꾸어 번역했습니다. 첫 단계 "독서"를 "읽어라"란 Read로, 둘째 단계 "묵상"을 "생각하라"란 Think로, 셋째 단계 "기도"를 "기도하다"란 Pray로, 마지막 넷째 단계 "관조 또는 조명"을 "생활하라"란 Live로 말입니다. Lectio Divina가 머리로만 생각해서 되는 것이 아니라 실제로 실천해보아야 그 진가를 알 수 있기에 "행동"을 강요하는 동사로 바꾸어 놓은 것이지요.
피터슨 목사가 설명하는 "관조 또는 조명(Contemplatio)"는 말씀 안에서 살아가는 것입니다. 피터슨 목사는 이 부분을 매우 중요하게 여기고 있습니다. 아무리 성경 말씀을 읽고, 묵상하고, 기도한다하더라도 그 말씀 안에서 생활하지 않는다면 열매를 맺지 못하는 나무와 같지요. 하나님에 관한 말만 무성하게 하고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행동이 없다면 잎사귀만 무성하고 열매가 없어서 예수님께 저주받은 무화과나무와 다를 바가 없지요(마 21:19). "관조 또는 조명"란 Lectio Divina의 세 단계인 읽기, 묵상, 기도를 거친 말씀이 삶으로 승화되는 마지막 단계입니다. 마음 문을 열고 하나님의 말씀을 진정으로 받아들인다면 그 말씀은 당신 안에 한 부분이 되어서 당신의 삶을 변화시킬 것이라고 피터슨 목사는 말합니다. 말씀이 삶을 변화시킨다는 것은 곧 말씀대로 행동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Lectio Divina의 네 단계를 자세히 살펴보면 처음 두 단계에서 나중 두 단계로 옮겨갈 때 중심이 전환되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처음 두 단계에서는 내가 주체가 되어 말씀을 읽고 묵상합니다. 그러나 나중 두 단계에서는 주체가 성경말씀으로 옮겨집니다. 그래서 말씀기도에서는 나에게 말씀하시는 하나님의 음성이 중심이 됩니다. 말씀관조 또는 조명에서는 나의 생활을 조명하시고 인도하시는 하나님 말씀이 중심이 됩니다. 이런 점에서 나는 "Contemplatio"를 "관상"이라고 번역하는 것을 좋아하지 않습니다. 한글로 "관상"이라는 말은 적용하는 한문에 따라 의미가 달라집니다. "관상(觀象)"이라 할 때는 "형상을 본다"는 의미가 되며, "관상(觀想)"이라 할 때는 철학적인 면에서 "생각을 본다"는 의미가 됩니다. 두 경우 모두 내가 주체가 되어서 무엇을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Lectio Divina의 마지막 단계인 Contemplatio는 내가 아니라 말씀이 주체가 되는 것이다. 그래서 나는 번역자로서 "말씀의 빛이 나의 삶을 조명(照明)하시고 인도하신다"는 의미를 내포한 "관조 또는 조명(觀照)"란 용어를 선호합니다. 시편 119:105절에도 "주님의 말씀은 내 발의 등이요 내 길의 빛이니이다"란 "관조 또는 조명"을 지지하는 말씀이 있습니다.
사실 "관상기도"라는 것은 최근에 만들어진 말이지 본래 Lectio Divina를 소개했던 수도사 구이고(GuigoII)가 사용한 용어는 아닙니다. 구이고는 "기도"와 "관상(=관조 또는 조명)"를 분명하게 구분해놓았지요. 물론 피터슨 목사도 이 사실을 알고 그의 묵상집 Solo에서 분명하게 구별시켰습니다.
왜 피터슨 목사는 "관조 또는 조명" 또는 "관상"이라고 하는 Contemplatio(콘템플라찌오)를 "생활하라(Live)"라고 번역해 놓았을까요. 이 질문에 대답하기 위해서는 Lectio Divina(렉지오 디비나)를 최초로 소개한 수도사 구이고(GuigoII)의 설명을 되짚어 볼 필요가 있습니다. 구이고는 "기도(Oratio)" 단계에서 기도자는 철저하게 주님과 인간 사이의 거리를 경험하게 된다고 말합니다. 한 없이 낮은 곳에 있는 인간 자신과 도저히 다다를 수 없이 높은 곳에 계신 주님을 깨닫게 됩니다. 영혼이 원하는 말씀의 지식과 체험의 달콤함은 도저히 스스로 얻을 수 없다는 것을 알게 되는 것이지요. 또 다른 말로 성경말씀 뒤에 숨겨진 주님의 영광의 얼굴은 주께서 보여주셔야만 볼 수 있다는 것을 알게 된 것입니다. 이런 것들을 알면 알수록 기도자는 더욱 애타게 기도하게 됩니다. 말씀의 달콤함을 맛보게 해달라고, 한 방울이라도 천상의 음료를 내려 자신의 목을 축여달라고, 문자 뒤에 숨겨진 당신의 얼굴을 보여 달라고 애타게 부르짖게 되지요. 그래서 구이고는 "기도(Oratio)"를 설명할 때 기도자의 "영적 갈망"을 언급했습니다.
그러다가 "관조 또는 조명(Contemplatio)" 단계로 넘어가면서 구이고는 주님의 개입에 대해서 설명합니다. 주님은 애타게 부르짖는 기도자를 듣고 보기만 하고 계신 분이 아니십니다. 기도를 끝까지 기다리지도 않고 중간에 침노해 오십니다. 급하게 달려와서 천상의 음료를 내려 영혼의 목마름을 축여주시고, 천상의 빵으로 영혼의 배고픔을 채워주십니다. 육체의 욕구는 죽어지고 영혼은 새롭게 살아납니다. 새로운 피조물 즉 영적인 존재가 되는 것이지요. 이런 영적인 존재로서 살아가는 것이 영적인 삶이며, 이런 생활이 곧 "관조 또는 조명"인 셈이지요.
기독교인들은 주님 곧 예수님을 신랑으로 비유합니다. Lectio Divina에서 "기도(Oratio)"는 신랑을 애타게 기다리는 상태라면 "관조 또는 조명(Contemplatio)"는 신랑을 만나 뵈는 단계, 만난 신랑이 신부를 어루만지시는 단계, 신부는 신랑과 짝을 이루어 행복을 맛보는 단계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한마디로 신랑과 함께 생활하는 단계가 "관조 또는 조명"인 셈입니다. 그래서 구이고는 "관조 또는 조명"을 설명할 때 "달콤함"이란 표현을 자주 사용하고 있습니다. 영혼이 천상의 달콤함에 취해있는 상태가 관조 또는 조명인 셈이지요. 영혼이 가장 축복을 받은 상태입니다. 구이고는 관조 또는 조명의 단계에 있는 사람은 완전한 축복을 받은 영적 인간이라고 합니다.
그러면 이와 같은 축복된 삶 즉 영적인 삶은 어떻게 이루어지는가. 여기서 우리는 Lectio Divina의 기초가 성경말씀이라는 사실을 다시 상기해볼 필요가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단순히 기록된 문자의 차원을 넘어서 살아있는 생명의 말씀입니다. 기독교인들은 이 말씀이 육신이 되신 분을 예수님 즉 신랑이라고 고백하지요. 그래서 신랑이 달려와서 애타게 기다리는 신부를 만나준다는 것은 곧 말씀이 내 안에 들어와 나와 하나가 되는 것이지요. 신랑이 신부를 어루만지는 것은 내 안에 계신 말씀이 나를 어루만지시는 것이지요. 신랑과 짝을 이루어 생활을 한다는 것은 곧 말씀이 내 안에 계셔서 나를 지배하는 삶을 산다는 것이지요. 결국 최상의 복을 받은 기독교인은 말씀에 온전히 지배받으며 말씀의 능력을 체험하는 생활을 하는 사람입니다. 그것이 "관조 또는 조명(Contemplatio)"입니다. 그래서 피터슨 목사는 "관조 또는 조명"을 "생활하라"라고 번역해서 사용하고 있는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