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Insight

시편 23편은 성경을 거울로 삼아 자신의 부족함을 회복시키는 하나님의 모습을 묵상하는 글입니다. 다윗의 고백을 통해 하나님과의 관계를 목자와 양의 관계로 비유하며, 영혼의 회복과 인도하심을 경험하는 과정을 설명합니다. 문법적 이해와 단어의 상호 관계를 통해 본문을 깊이 있게 해석하며, 영성독서를 통해 하나님을 실제적으로 경험하는 방법을 제시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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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 시편 23편에 관한 말씀묵상

성경은 거울입니다. 거울을 보면 다른 사람이 아닌 내 얼굴이 보입니다. 영성독서를 하는 사람은 성경을 읽으면서 무엇보다도 자신의 모습을 보아야 합니다. 하나님은 말씀을 통하여 우리들의 참 모습을 들여다보기를 원하십니다. 예수님께서 지상 사역을 하실 때 첫 설교는 "회개하라"라는 말씀이었지요. 회개는 자신의 진짜 모습을 볼 줄 아는 사람이 할 수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 자신이 어떤 모습을 하고 있는지 들여다보라고 거울과 같은 말씀, 성경을 주신 것입니다.
영성독서에서 말씀묵상을 하려면 글과 글의 법칙에 대한 이해가 필요합니다. 한글로 된 성경말씀은 한글을 이해할 줄 아는 사람에게 감동을 줍니다. 한글을 전혀 모르는 외국인은 한글로 기록된 성경책을 이해할 수 없습니다. 글을 이해할 줄 모르기 때문입니다. 글을 기록하거나 읽기 위해서는 사용된 단어들에 대한 이해와 그 단어들을 배열하는 글의 법칙 즉 문법에 대한 이해가 있어야 합니다. 성경을 기록한 사람들도 하나님의 뜻을 정확하게 전달하기 위해서 당시에 사용되었던 글의 법칙을 따라 성경말씀을 기록했습니다. 성경을 한글로 번역할 경우에도 번역자는 한글의 법칙에 따라야 합니다. 결국 성경을 읽는 사람은 글에 대한 법칙을 잘 알면 알수록 본문에 대한 정확한 이해를 할 수 있습니다.
앞으로 다윗의 시편 23편의 말씀을 묵상하면서 글의 법칙에 의한 본문 이해를 설명하고 또한 어떻게 본문 안에서 자신의 모습을 비추어 보는지 살펴보고자 합니다. 여기서는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가 부족함이 없으리로다"란 1절만 묵상해봅니다. 글의 법칙에 의해 살펴본다면 이 문장은 두 개의 절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중심이 되는 절 즉 주절은 "내가 부족함이 없으리로다"입니다.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는 이유를 나타내는 종속절입니다. 그래서 1절의 중심은 "내가 부족함이 없으리로다"에 있습니다.
먼저 "내가 부족함이 없으리로다"를 살펴봅니다. 이 문장은 다윗을 가리키는 "내가"란 주어와 "부족함이 없으리로다"란 동사구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여기서는 "부족함이 없으리로다"라는 동사구의 시제를 아는 것이 중요합니다. 이 구절은 현재가 아니라 미래를 가리킵니다. 그래서 본 문장을 풀어쓰면 "나 다윗은 앞으로는 부족함이 없을 것입니다"라는 말이 됩니다. 이 표현 속에는 다윗의 현재 모습이 암시되어 있습니다. 현재 다윗은 부족함이 있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다윗이 언급하고 있는 자신의 부족한 모습은 이후 계속되는 문장 구석구석에 들어 있습니다. 현재는 그런 참담한 부족함이 있을지라도 곧 해결될 것이라고 다윗은 고백합니다. 또한 본 문장은 다윗의 심경도 담고 있습니다. 그것은 미래에 대한 확신입니다. 현재는 나약하고 부족하지만 이 문제는 곧 해결 될 것이라는 확신에 찬 심정이 담겨져 있습니다. 다윗은 자신의 이런 확신을 본 시편의 맨 첫 문장에서 담대하게 선포하고 있는 것입니다.
영성독서를 하는 사람은 성경에서 "내가 부족함이 없으리로다"란 구절을 읽으면서 현재 자신의 인생을 어렵게 만들고 좌절시키고 있는 부족함이 무엇인지를 비추어 봅니다. 믿음의 사람 다윗이 확신에 찬 어조로 "부족함이 없으리로다"라고 선포한 것처럼 자신에게도 그런 나약함, 부족함을 극복할 수 있는 믿음, 확신이 과연 있는지 자신의 모습을 들여다봅니다.

"Trunk(트렁크)"란 영어 단어의 뜻을 아십니까? 사전을 찾아보면 이 단어는 "(짐을 넣는) 가방, (코끼리의) 코, (사람의) 가슴, (나무의) 줄기, (자동차) 짐칸, (혈관의) 대동맥" 등 다양한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단어 하나를 놓고 볼 때는 모두가 답이 되지만 문장 안에서 다른 단어와 결합되면 그 의미는 제한되고 분명해집니다. 예를 들면 문장 안에서 "Trunk"란 단어가 "자동차"와 연결되면 자동차 트렁크가 되며 이외 다른 의미들은 모두 틀린 말이 됩니다. 영성독서를 하려면 기본적으로 글의 법칙 즉 문법을 이해하는 것이 중요하며 또한 단어들의 상호관계를 이해하는 것도 중요합니다.
지난 호에서는 1절에 있는 "내가 부족함이 없으리로다"란 문장을 문법적인 이해에 초점을 맞추어 설명했습니다. 이 문장에서 "부족함이 없으리로다"란 동사구절의 시제를 파악함으로 다윗의 현실적인 문제를 들춰낼 수 있었습니다. 참담한 현실에 처해 있기 때문에 다윗은 앞으로 "부족함이 없을 것입니다"라는 미래적인 표현을 문장에 사용했던 것입니다.
문법 이해의 중요성과 더불어 이번 호에는 단어나 구절들의 상호 관계의 중요성을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란 문장을 통해서 살펴보고자 합니다. 이 문장은 뒤에 있는 주절에서 드러난 것처럼 다윗이 미래에 대해 확신하게 된 이유를 나타내는 종속절입니다. 여기서는 "여호와, 나, 목자" 등 세 가지 단어가 언급되고 있습니다. 각 단어들 자체만 놓고 보면 끝도 없이 많은 의미를 갖고 있습니다. "여호와"라는 단어 하나만 가지고도 여러 논문들이 나올 정도로 다양한 해석과 설명들이 있습니다. 여기서 "나"는 "다윗"을 가리킵니다. 다윗이란 인물을 볼 때도 출생부터 죽음까지 변화무쌍한 인생을 살았습니다. "목자"라는 단어만 가지고 볼 때 우리는 "선한 목자, 악한 목자, 성실한 목자, 게으른 목자"등 다양한 목자들을 생각할 수 있습니다. 단어 하나하나를 놓고 볼 때 위와 같이 수도 없이 많은 설명들을 할 수 있겠지만 시편 23편 내에서 각 단어들은 서로 연결되면서 그 의미들이 제약되고 분명해집니다.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여호와"는 하나님의 이름입니다. 이 이름이 "나"라는 다윗과 연결되면서 본문에서 여호와는 다윗이 믿는 하나님이 됩니다. 당시에 "바알"이나 "아세라"와 같은 이방신들이 있었지만 다윗의 신은 분명 "여호와"라고 밝히는 것입니다. 이 하나님은 "내가 부족함이 없으리로다"란 구절과 연결되면서 다윗의 부족함을 해결해주는 하나님이 됩니다. "나"는 다윗을 가리킵니다. 이 단어가 "여호와"와 연결되면서 시편 23편은 공동체의 고백이 아니라 다윗 개인의 고백임을 알 수 있습니다. 또한 여기서 말하는 "나"는 전 인생 가운데 어느 한 기간의 다윗을 말합니다. 이 "나"는 뒤에 "부족함이 없으리로다"라는 구절과 연결되면서 다윗의 일생 가운데 가장 힘들고 부족했던 시기의 다윗임을 유추할 수 있습니다. "나의 목자"란 표현에서 "나"는 "목자"와 연결되면서 다윗은 자동적으로 "양"의 모습으로 변환됩니다. 여기서 "양"의 모습은 뒤에 "부족함이 없으리로다"란 구절을 통해 살찌고 건강한 양이 아니라 지치고 피곤한 양의 모습임을 알 수 있습니다. 그래서 본문에 "목자"는 이런 지치고 피곤한 양을 돌보는 목자가 되는 것입니다. 이 "목자"가 곧 "여호와"라는 것이지요. 일생 가운데 가장 힘들고 지쳐 있는 다윗을 목자와 같이 돌보아 주는 분은 오직 "여호와" 뿐이라는 믿음이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란 구절 안에 들어 있는 것입니다.

이미 1절에서 여호와와 다윗의 관계를 목자와 양의 관계로 제시했습니다. 특히 양으로 암시된 다윗은 몹시 부족한 상태였습니다. 이런 양의 문제를 해결해주는 목자의 모습이 "그가 나를 푸른 초장에 누이시며"라는 문장 안에 들어 있습니다. "푸른 초장"이란 사람에게 필요하다기보다는 양에게 필요한 장소입니다. 그러므로 본 문장이 갖고 있는 기본적인 형상은 여호와와 다윗의 모습이라기보다는 목자와 양의 모습입니다. 물론 목자는 여호와이고 양은 다윗을 가리킵니다. 본 문장 안에 "푸른 초장"이란 장소가 언급되었기 때문에 목자와 양의 형상은 더욱 분명하게 드러나게 됩니다.
목자는 양을 "푸른 초장"으로 데리고 갔습니다. 풀밭을 의미하는 "초장"은 양들이 먹을 양식이 있는 장소입니다. 그런데 본문은 "초장"을 수식하는 "푸른"이란 단어를 덧붙였습니다. "푸른"이란 색깔이 풀에 적용될 때 그런 풀은 영양이 풍부한 기름진 풀, 질적으로 좋은 풀을 가리킵니다. 또한 "푸른"이란 색깔이 초장에 적용될 때는 양적으로 풍성하다는 것을 가리킵니다. 결국 "푸른 초장"이란 기름지고 풍성한 풀들이 있는 장소를 가리키는 말입니다. 목자가 이런 곳으로 양을 데리고 간 것입니다. 여기서 당연히 전제하고 있는 사실은 목자는 양에게 필요한 푸른 초장이 어딘지 알고 있다는 것이지요.
본문은 목자가 양떼들을 데리고 갔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다윗을 비유한 양 한 마리를 데리고 간 것입니다. 그 양은 현재 영양이 부족한 상태입니다. 목자는 그 양에게 가장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 잘 알고 있습니다. "푸른 초장"입니다. 그래서 양을 그곳으로 데리고 간 것입니다. 시편 23편의 목자는 양의 현재 상태를 알고, 양에게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 아는 목자이며, 알고만 있는 것이 아니라 그런 부족함을 실제로 채워주는 목자입니다. 그래서 "다윗은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가 부족함이 없으리로다"라고 자신 있게 선포하고 있는 것입니다.
문제는 "누이시며"란 동사에 있습니다. 일반적으로 목자는 양들을 푸른 초장으로 데리고 갑니다. 그렇다면 다윗은 "그가 나를 푸른 초장에 인도하시며"라고 써야할 것입니다. 그런데 다윗은 "인도하시며"란 동사 대신에 "누이시며"를 사용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누이시며"란 동사는 무엇을 의미합니까? 여기서 눕히는 동작을 하는 주체는 목자입니다. 그리고 양은 동작을 받고 있습니다. 흔히 넓고 기름진 푸른 풀밭에서 양들이 뛰어놀다가 스스로 누워서 쉬는 것을 상상하기 쉽습니다. 그럴 경우에는 본문을 "그가 누이시며"라고 기록할 필요가 없습니다. "내가 누우며"라고 해야 맞을 것입니다. 그런데 본문은 분명히 "그가 누이시며"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목자가 양을 눕히는 장면이 이 동사에 들어 있습니다. 마치 병들고 지쳐서 걷지 못하는 아이를 엄마가 품에 안고 침대로 가서 눕히는 모습과 흡사합니다. 결국 "누이시며"란 단어 안에는 현재 병들고 지쳐서 걸을 수조차 없는 양의 모습이 들어 있습니다. 이 표현을 통해 다윗은 현재 스스로 걷는 것조차 힘겨워할 정도로 약하고 지친 상태에 있음을 암시하고 있습니다. 이렇게 지쳐 쓰러져버린 양과 같은 다윗을 목자 되신 여호와께서 품에 안고 푸른 초장으로 가셔서 거기에 눕혀놓으시는 장면이 "그가 나를 푸른 초장에 누이시며"란 문장 안에 들어있는 것입니다.

이어지는 문장이 "쉴만한 물가으로 인도하시는도다"입니다. 말씀묵상에서 중요한 것이 단어, 구절, 문장, 등의 상호 관계를 찾아내는 것입니다. 시편 23편 본문에서 "쉴만한 물가로으로 인도하시는도다"란 문장 하나만 놓고 보면 누가 누구를 인도하는지 분명하지 않습니다. 그런데 앞 문장을 관계시키면 주어 역할을 하는 "그가"와 목적어 역할을 하는 "나를"이란 인칭대명사들이 이 문장과 관계되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면 인도하는 주체인 "그"는 누구이며 인도받는 대상인 "나"는 누구인가를 규정해야 합니다. 앞 문장에서 밝힌 대로 "그"는 "목자"이고 "나"는 "양"입니다. 물론 목자는 여호와이며 양은 다윗이지만 본문에서는 아직 양과 목자의 모습으로 상황을 그려내고 있습니다.
본문에는 "목자가 양을 인도한다"는 내용이 들어 있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목자와 양의 위치를 묵상해 볼 수 있습니다. 누가 앞장서고 누가 뒤에서 따르는지 규정해야 합니다. 양을 키워본 경험이 없는 사람들에게는 상식적인 이해가 본문 해석에 기초가 됩니다. 일반적으로 인도자가 앞장서고 인도받는 대상은 뒤에서 따릅니다. 목자는 가야할 곳, 쉴만한 물가가 어디 있는지 알기 때문에 앞장서고 갈 길을 모르는 양은 뒤에서 따르는 것이 당연한 위치입니다. 우리는 여기서 인생의 한치 앞도 내다볼 줄 모르는 양을 위해서 쉴만한 물가가 있는 곳으로 앞장서 가시며 따라오라고 하는 목자가 되신 여호와의 모습을 찾을 수 있습니다.
"인도하시는도다"라는 동사는 한 장소 다른 장소로 이동하는 것을 가리키는 말입니다. 도착 장소는 물이 있는 "물가"라고 언급되어 있습니다. 물이 없는 곳에서 물이 있는 곳으로 이동하는 것입니다. 이 물은 목자를 위한 것이 아니라 양을 위한 물입니다. 더욱이 목자가 양을 인도하는 곳은 "풍랑이 일어나는 위험한 물가"가 아니라 "물결이 잔잔한 쉴만한 물가"입니다. 우리는 "쉴만한 물가"라는 구절을 통해서 그만큼 양을 배려하는 목자의 마음이 읽을 수 있습니다.
목자가 양을 인도하는 장면 안에는 양이 자기 발로 인도하는 목자를 따라가는 모습이 들어 있습니다. 양이 스스로 걸을 수 있을 만큼 힘이 생겨난 것입니다. 이것은 양이 걸을 힘도 없어서 목자가 그 양을 품에 안고 푸른 초장까지 가서 누이시는 앞 문장과 대조적인 모습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양이 푸른 초장에서 회복된 것입니다. 회복된 후에는 목자의 인도에 의해 쉴만한 물가로 따라가고 있습니다. 2절에서 우리는 목자의 두 가지 모습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회복시키시는 목자의 모습과 인도하시는 목자의 모습입니다. 여호와는 지치고 쓰러져 있는 양에게는 품에 안고 회복시켜주시는 목자의 모습으로 다가오십니다. 스스로 일어서서 걸을 수 있는 양에게는 앞장서서 쉴만한 물가로 길을 인도해주시는 목자의 모습으로 다가오십니다.

다윗은 현실적으로 부족한 상태에 처해 있기 때문에 1절에서 "내가 부족함이 없을 것이로다"란 선포를 하고 있는 것입니다. 다윗은 자신의 부족함을 혼자서 해결하겠다는 것이 아닙니다. 목자되신 여호와께서 해결해주실 것이라고 확신하고 있습니다. 마치 양이 당한 문제를 목자가 해결해주는 것처럼 목자되신 여호와께서 양인 다윗의 부족함을 해결해주실 것이라고 믿었던 것이지요.
미래에 대한 확신에 찬 다윗은 2절로 접어들면서 회복과 새로운 삶을 현실적으로 경험하게 됩니다. 이런 경험은 여호와와 다윗의 관계를 목자와 양의 관계로 묵상하면서 일어납니다. 양은 풀도 없는 광야 한 복판에 지쳐 쓰러져 신음하고 있었습니다. 양은 자신의 발로 더 이상 걸을 수 없는 위태로운 상황에 처하게 된 것입니다. 그런데 목자가 그 양을 찾아 온 것입니다. 양은 쓰러져 있는 자신을 바라보는 목자의 긍휼한 눈빛을 경험했습니다. 목자가 양을 품에 안을 때는 조심스럽게 그렇지만 든든하게 자신을 감싸는 목자의 팔을 경험했습니다. 그리고 목자가 양을 품에 안고 푸른 초장에 도착하기까지 포근하게 감싸는 목자의 가슴을 경험했습니다. 푸른 초장에 도착하자 품에서 양을 조심스럽게 내려놓는 목자의 사랑을 경험했습니다. 양이 푸른 초장에서 기름진 풀을 먹으며 기운을 차리는 과정을 지켜보시면서 기뻐하시는 목자의 웃음을 경험했습니다. 양이 회복되자 양을 부르시고 쉴만한 물가로 인도하시는 목자의 인자한 음성을 경험했습니다.
1절에서 미래에 대한 다윗의 확신이 2절에서 현실적 경험으로 바꾸어진 것입니다. 즉 소망이 현실이 된 것입니다. 부족함이 없게 될 미래가 더 이상 기다릴 필요가 없게 된 것입니다. 지금 여기서 경험하는 사건이 된 것입니다. 히브리서 기자는 이런 경우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히 11:1)"라고 말했습니다. 이런 변화는 여호와와 다윗의 관계가 목자와 양의 관계로 전환되면서 일어난 것이지요. 다윗은 묵상을 통해서 자신을 양의 모습으로 전환시킨 후에 목자의 사랑을 실제적으로 경험한 것입니다. 영성독서에서 말씀묵상의 목적은 바로 이와 같이 말씀 속에서 하나님을 구체적으로 실제적으로 경험하는 것에 있습니다.
2절에서 양의 모습을 통해 목자의 사랑을 경험하던 다윗은 감정이 벅차오르자 3절에서 갑자기 본인 실제 모습으로 돌아갑니다. 즉 양의 모습에서 다윗 본연의 모습으로 다시 전환된 것입니다. 그래서 "내 영혼"은 양의 영혼이라기보다는 인간 다윗의 영혼을 말합니다. 다윗은 2절에서 양을 푸른 초장에 누이시는 목자의 행동이 실제로 무엇을 의미하는지 3절에서 다시 설명합니다. 그것은 다윗과 같은 사람의 영혼을 다시 살려내시는 하나님의 구원 행위입니다. 마찬가지로 2절에서 목자 되신 여호와께서 양인 다윗을 인도한다는 것이 실제적으로 무엇을 의미하는지 3절에서 다시 설명합니다. 그것은 여호와께서 자기 이름을 위하여 다윗과 같은 한 인간을 의의 길로 인도하시는 여호와 하나님의 거룩한 행위인 것입니다.
다윗은 시편 23편 1절과 2절에서 여호와를 목자로 자신을 양으로 묵상하면서 자신의 영혼을 치료하고 회복시키시며 의의 길로 인도하시는 하나님을 만났다고 3절에서 고백하고 있습니다. 영성독서의 목적은 이와 같이 말씀 묵상을 통하여 나의 현실 속에 살아계신 하나님을 만나는 것입니다.

시편 23편 본문을 정확하게 이해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사용된 단어들의 상호 관계를 파악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3절에서 "내 영혼을 소생시키고"란 문장을 보면 "내"란 대명사와 "영혼"이란 명사와 "소생시키다"란 동사가 서로 연관을 맺고 있습니다. 이 문장을 별 생각 없이 순식간에 읽어나갈 수도 있지만 영성 독서를 하는 사람은 이 문장 안에 들어 있는 단어 하나하나의 상호 연관성을 깊이 묵상해야 합니다.
먼저 "내 영혼을 소생시키시고"라는 문장에서 "소생시킨다"는 것은 "회복시킨다"는 말입니다. 이 동사 안에는 회복시키는 행위가 들어 있고, 회복이 되는 대상으로서 다윗의 영혼과 회복시켜주는 주체로서 여호와 하나님이 연관되어 있습니다. 일반적으로 몸이 회복된다고 말할 때는 이전에 몸이 약했었거나 병이 들어 있었음을 전제로 합니다. 마찬가지로 본문에서 다윗의 영혼이 회복된다고 말할 때는 이전에 영혼이 병들은 것처럼 약해져 있었다는 것을 암시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2절에서 목자가 품에 안아야 할 정도로 걷지도 못하던 양의 모습과 본 3절에 "소생시키시고"라는 동사가 암시하고 있는 이전 모습이 서로 일치하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2절에서는 목자가 지쳐 쓰러진 양을 누이셨다고만 기록했지 양이 회복되었다고 말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본 3절에 들어와서 다윗은 "소생시키시고"라고 표현을 통해 분명하게 회복을 말하고 있습니다.
다윗은 본 문장에서 "나를 소생시키고"라고 말하지 않습니다. 분명히 "내 영혼을 소생시키시고"라고 고백했습니다. 그렇다면 "나를" 소생시키는 것과 "내 영혼을" 소생시키는 것은 무슨 차이가 있습니까? "나"라는 것은 전체적인 표현이고 "나의 영혼"이라는 것은 부분적인 표현입니다. 즉 "영혼"이라는 것은 나에게 속한 한 부분입니다. 여호와 하나님께서 회복시켜주신 것은 다윗 자신 전체라기보다는 "영혼"입니다.
다윗은 사울 왕에 의해 쫓겨 다녔을 때에 배고픔을 겪기도 했고 생명의 위협을 당하기도 했으며 머물 곳이 없어서 블레셋으로 도피해 시글락이란 마을에서 살기도 했습니다. 아멜렉을 쳐서 우양을 노략질해야 할 정도로 생활이 궁핍하기도 했었습니다. 정작 다윗에게 필요로 한 것이 많았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그런 것들을 회복시켜주시기보다는 다윗의 영혼을 회복시켜주셨습니다. 그만큼 다윗에게 있어서 회복해야 할 중요한 것은 아름 아닌 다윗의 "영혼"이었기 때문입니다.
성경에서 최초로 여호와 하나님이 영혼을 회복시켜주는 장면이 창세기 2장 7절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거기서 하나님은 흙으로 사람을 만들었습니다. 상상해보면 아직 움직이지 못하는 흙덩어리에 불과한 사람이었지요. 하나님이 그 흙 사람의 코에 생기를 불어 넣으니 "생령"이 되었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생령"이나 시편 23편 3절에서 "영혼"이나 모두 "네페쉬"란 히브리 단어를 한글로 다르게 번역한 것 뿐 입니다. 결국 "생령"이나 "영혼"은 같은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영성독서에서 본문을 깊이 묵상하면 할수록 문장 안에 있는 단어들이 서로 긴밀하게 연관되어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또한 한 문장이 다른 문장들과 서로 관계를 맺으면서 의미를 보완해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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