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이고 2세의 "수도사들의 사닥다리"는 영성독서(Lectio Divina)의 네 가지 단계를 체계적으로 설명하는 고전적인 문헌입니다. 이 글은 독서(Lectio), 묵상(Meditatio), 기도(Oratio), 관조 또는 조명(Contemplatio)의 단계를 통해 수도사들이 영적 성장을 이루는 과정을 다룹니다. 각 단계는 성경 본문을 읽고, 묵상하며, 기도하고, 하나님의 임재를 체험하는 과정을 설명합니다. 구이고는 이 과정을 통해 영혼이 하늘로 올라가는 사닥다리를 비유적으로 설명하며, 각 단계의 중요성과 기능을 상세히 설명합니다.
🗺️ Knowledge Map
- 서문: 구이고 2세가 형제 게르바세에게 보내는 편지로 시작하며, 수도사들의 영적 훈련에 대한 자신의 생각을 공유합니다.
- 용어 문제: 성경 번역에서의 용어 선택의 중요성을 설명하며, "평화", "화평", "평강"의 예를 들어 설명합니다.
- 영성독서의 네 단계:
- 독서(Lectio): 성경을 신중히 읽고 집중하는 단계.
- 묵상(Meditatio): 본문 속 영적 진리를 찾는 합리적 사고 과정.
- 기도(Oratio): 하나님께 헌신된 마음으로 악을 물리치고 선을 구하는 단계.
- 관조 또는 조명(Contemplatio): 하나님의 임재를 체험하며 영적 기쁨을 누리는 단계.
- 각 단계의 기능과 효과:
- 독서: 성경 본문을 신중히 읽어 영적 갈망을 일으킴.
- 묵상: 본문을 깊이 탐구하여 영적 진리를 깨달음.
- 기도: 영혼의 갈망을 하나님께 드러내며, 하나님의 응답을 구함.
- 관조 또는 조명: 하나님의 임재를 통해 영혼이 새롭게 되고, 세속적 욕구를 초월함.
- 결론: 영성독서의 중요성과 구이고의 글이 개신교 신학에 미친 영향을 강조하며, 영
5. 수도사들의 사닥다리
구이고 2세의 글 "수도사들의 사닥다리"를 풀어서 소개하려고 합니다. 소개에 앞서 용어 문제를 다루고자 합니다. 한글 개역 성경에 보면 "평화" "화평" "평강"이란 용어들이 나옵니다. 일단 사용된 단어들이 다르기 때문에 원어도 서로 다를 것이란 생각을 하게 됩니다. 그런데 사실 구약에 나오는 이 단어들은 모두 히브리어 "샬롬"이란 한 단어를 번역한 것입니다. 같은 단어인데 한글로는 세 가지 다르게 번역해 놓았다는 것이지요. 신약에서도 마찬가지이지요. 신약 헬라어로 "에이레네"라는 한 단어인데 한글로는 "평화" "화평" "평강"로 번역해 놓았지요.
번역자들이 영문을 한글로 번역을 할 때는 원어의 의미만 고려하는 것이 아니라 번역에 사용될 단어들의 의미도 고려합니다. 단순하게 보면 영어 단어 "meditation"을 번역할 때 "묵상"이나 "명상"이란 단어를 둘 다 사용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meditation이 기독교 문서에서 언급된 경우라면 번역자는 기독교적 용어를 선택해야 하고 불교 문서에서 언급된 경우에는 불교적 용어를 선택해야 합니다. 이미 기독교 안에서는 "명상"이란 용어보다도 "묵상"이란 용어가 정착되어 있다면 특별한 경우가 아니면 "묵상"으로 번역하는 것이 옳습니다. 영어 단어 "contemplation"도 "관조“ 또는 ”조명" 또는 "관상"으로 번역할 수 있습니다. 기독교 내에 아직 정착되지 이런 용어는 그 의미를 살펴 번역합니다. 같은 한글이라도 적용되는 한문에 따라 뜻이 다르게 쓰이는 것이 한글의 특성입니다. "관상"이란 한 단어도 "형상을 본다"는 의미로 "관상(觀象)"을 사용하는 사람도 있고, 철학적인 면에서 "생각을 본다"는 의미로 "관상(觀想)"을 사용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저는 번역자로서 "contemplation"을 "하나님의 빛 아래서 고요한 마음으로 말씀을 바라본다"는 의미로 "관조“(觀照)" 또는 ”조명“을 선택한 것입니다.
다음은 구이고의 글 "수도사들의 사닥다리" 서문입니다. "수도사들의 사닥다리"는 영성독서(Lectio Divina)에 대한 체계적 설명으로서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것이기 때문에 전문을 읽어볼 필요가 있습니다.
"구이고가 사랑하는 형제 게르바세(Gervase)에게 편지를 보냅니다. 형제님, 주 안에서 기뻐하십시오. 나는 당신에게 사랑의 빚을 졌습니다. 왜냐하면 당신이 먼저 나를 사랑했기 때문이지요. 먼저 편지에 당신은 나에게 편지를 쓰라고 말씀하셨지요. 그래서 저는 답장을 해야겠다고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저는 수도원에 있는 수도사들에게 맞는 영적 훈련들에 대한 나의 생각을 써서 보내기로 결심했습니다. 이론적으로만 알고 있는 저보다 당신은 경험에 의해 이런 문제들에 대해 더 알고 계시기 때문에 저의 생각들을 판단해주시고 수정해주실 수 있으실 것입니다. 또한 다른 사람들보다는 먼저 당신에게 우리의 첫 성과를 모아서 드려야 당연하다고 생각합니다. 그렇게 되면 당신은 바로의 속박으로부터 은밀하게 뽑아낸 젊은 나무로부터 맺어지는 열매들을 거둘 수 있을 것입니다. 본래 그 젊은 나무는 돌감람나무처럼 혼자서 자라고 있었지요. 그런데 당신은 마치 훌륭한 정원사처럼 그 가지를 능숙하게 잘라낸 후에 그것을 나무줄기에 접붙이셨지요. 그리고 나서 그 나무를 잘 정돈된 나무들 가운데 옮겨 심으셨지요."
"손을 바쁘게 놀리며 일하고 있었던 어느 날이었습니다. 사실 그때까지 저는 우리 수도사들이 영적인 성장을 위해서 무엇을 해야 하는지 곰곰이 생각하고 있었지요. 그러다가 그날 갑자기 영적인 생활을 하기 위해서 실천해야 되는 네 가지 단계가 머릿속에 떠올랐습니다. 그 네 단계란 독서(Lectio), 묵상(Meditatio), 기도(Oratio) 그리고 관조 또는 조명(Contemplatio)였습니다. 이 네 가지는 수도하는 사람들이 올라가야 하는 사닥다리의 계단들과 같습니다. 그 사닥다리를 밟으면서 수도사들은 땅에서 하늘로 올라가게 됩니다. 모두 네 계단 밖에 되지 않지요. 그렇지만 그 사닥다리의 길이는 우리의 상상을 초월합니다. 그 사닥다리의 아래 끝은 땅 위에 닿아 있고 그 위쪽 끝은 구름을 뚫고 천상의 비밀까지 이어져 있습니다.
그 사닥다리의 계단들은 각각 "독서" "묵상" "기도" "관조 또는 조명"란 서로 다른 이름들로 되어 있습니다. 이 네 계단들은 순서로 볼 때나 특성으로 볼 때 서로 차이가 있습니다. 만일 누가 그 네 계단들이 지니고 있는 특성이나 기능이 무엇인지, 그 계단들이 우리와 어떤 관련이 있는지, 그 계단들 간에 서로 어떠한 차이가 있는지, 그 계단들이 얼마나 중요한지 등을 깨닫기 위해서 아무리 많은 수고와 노력을 쏟아 부을 지라도 나중에 그것들로 인해 얻게 될 도움과 위로에 비하면 그런 수고와 노력은 아무것도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될 것입니다.
독서는 성경을 신중하게 읽어가는 것입니다. 그렇게 하려면 온 힘을 성경 본문을 읽는 데에 집중해야 합니다. 묵상은 합리적인 사고를 통해서 본문 안에 숨겨진 영적 진리를 찾아내는 것입니다. 기도는 악한 것을 쫓아버리고 선한 것을 붙잡기 위해서 헌신된 마음을 하나님께로 향하는 것입니다. 관조 또는 조명은 마음이 하나님께로 가까이 다가가서 하나님의 품에 안기어 영원한 사랑의 기쁨을 맛보는 것입니다. 네 가지 단계를 설명했으니 지금부터는 각 단계가 우리와 어떤 관계가 있는지 알아야 합니다.
독서는 은혜를 받은 생활의 달콤함을 갈망합니다. 묵상은 그것이 어디 있는지 감지합니다. 기도는 감지된 그것을 찾아냅니다. 관조 또는 조명은 찾아낸 그것을 맛봅니다. 다르게 설명하면, 독서는 음식 전체를 입에 넣는 것과 같습니다. 묵상은 그것을 씹으면서 잘게 부수어 놓는 것과 같습니다. 기도는 그것의 맛을 추출해내는 것과 같습니다. 관조 또는 조명은 기쁨과 신선함을 주는 그 맛을 보는 것입니다. 독서는 밖에서 하는 작업입니다. 성경본문을 집중해서 눈으로 읽는 작업이지요. 묵상은 중심에서 하는 작업입니다. 읽은 본문의 내용을 마음속으로 끌어들이는 작업이지요. 기도는 우리가 갈망했던 말씀의 달콤함을 찾아줍니다. 관조 또는 조명은 우리가 발견한 그 달콤함으로 인해 우리에게 영성의 기쁨을 줍니다. 이것을 더 명확하게 하기 위해서 여러 가지 가능한 예들 가운데 하나를 다음에 들어보겠습니다."
다음은 구이고의 "수도사들의 사닥다리"에서 독서의 기능에 관한 설명입니다.
나는 "마음이 청결한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하나님을 볼 것임이요(마 5:8)"라고 읽는 말씀을 듣습니다. 이것은 짧은 성경 구절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아주 감미로운 맛을 주는 말씀입니다. 마치 입안에 들어 있는 포도송이와 같지요. 이 포도송이와 같은 말씀을 맛볼 수 있는 입이란 영혼의 양식을 공급하기 위해서 다양한 맛들을 감지해 낼 수 있는 다양한 감각기관들을 갖춘 영혼의 입을 말합니다. 영혼은 입 안에 들어온 위에 말씀을 세심하게 관찰합니다. 그러면서 영혼은 스스로 이 말씀에는 선한 어떤 것들이 있다고 말합니다. 먼저 "마음이 청결한 자는 복이 있나니"란 말씀을 맛보기 위해서는 나 스스로 "마음"을 향해 돌아서야 합니다. 마치 방탕한 아들이 아버지를 향해 돌아서듯이 말입니다. 그리고 본 말씀에 "청결함"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이해하려고 애를 써야 합니다. 어떤 것이 마음의 청결함인지 찾아 내야합니다. 청결한 마음이야 말로 진실로 귀하고 아름다운 것입니다. 본문 말씀은 "마음의 청결함" 그것을 지닌 사람이야 말로 참으로 축복을 받은 사람이라고 선포하고 있습니다. 마음이 청결한 사람에게는 영원한 생명이신 하나님을 볼 수 있는 상급이 주어집니다. 뿐만 아닙니다. 마음이 청결한 사람은 성경 안에 여러 곳에서 칭송을 받습니다. 그래서 이 말씀에 대해 더욱 충분한 이해를 하기 원하면서 영혼은 입 안에 들어온 포도송이와 같은 말씀을 물고 씹기 시작합니다. 마치 농부가 포도즙을 내기 위해서 틀에 포도를 넣고 기계를 돌리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영혼은 합리적인 사고력을 돌려가면서 마음의 청결함이란 무엇이며 어떻게 해서 그것을 가질 수 있는지 계속해서 질문합니다.
다음은 구이고의 "수도사들의 사닥다리"에서 묵상의 기능에 관한 설명입니다.
말씀을 깨닫기 위해서 부지런히 묵상하면, 묵상은 겉에 드러난 문자에만 머무르지 않습니다. 별로 중요치 않은 것들에 묶이지 않습니다. 더 높은 곳을 향해 오르기 시작합니다. 문제의 핵심 안으로 들어가서 각 요점들을 철저하게 파헤칩니다. 묵상은 본문에 기록되어 있지 않는 "몸이 청결한 자는 복이 있나니"란 것도 세심하게 살펴봅니다. 성경은 분명하게 "몸"이 아니라 "마음"이 청결한 자가 복이 있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사실 악한 행실을 없애기 위해서 나쁜 짓을 하는 손만 씻는 것은 부족합니다. 우리 마음이 악하고 더러운 생각들로부터 깨끗해져야 합니다. 이것에 대해 구약에 한 선지자가 "여호와의 산에 오를 자 누구며 그의 거룩한 곳에 설 자가 누구인가 곧 손이 깨끗하며 마음이 청결하며...(시 24:3-4)"라고 선포했습니다. 그리고 묵상을 통해서 그 선지자가 다음과 같은 기도를 통해 얼마나 열심히 마음의 청결함을 갈망했는지 깨닫게 됩니다: "하나님이여 내 속에 정한 마음을 창조하시고(시 51:10)"와 "내가 나의 마음에 죄악을 품었더라면 주께서 듣지 아니하시리라(시 66:18)". 또한 묵상을 통해서 동방의 성자라고 일컫는 욥이 이런 마음의 청결함을 유지하기 위해 얼마나 조심했는지 생각합니다: "내가 내 눈과 약속하였나니 어찌 처녀에게 주목하랴(욥 31:1)". 무심코 헛된 것을 보지 않기 위해서 욥은 자신의 눈을 닫았습니다. 묵상을 통해 욥이 청결한 마음을 지키기 위해 얼마나 자신을 돌아보았는지 깨닫게 됩니다.
앞에서 묵상을 통해서 이미 "마음의 청결함"에 대해 깨달았습니다. 다음으로는 마음이 청결한 자에게 주어지는 상급인 "하나님을 보게 되는 것"에 대해 묵상합니다. 그렇게 소망했던 주님의 얼굴을 보게 되는 것이 얼마나 큰 영광이고 기쁨인지 묵상합니다. 어느 누구보다도 더 아름다운 주님의 얼굴, 더 이상 비천하지도 않고 거절당하지도 않는 그 얼굴을 말입니다. 이 땅에 그분의 어머니였던 마리아가 그에게 입혀준 땅의 아름다움이 아닙니다. 그분의 하늘 아버지가 그의 부활의 날, 영광의 날, "갚아주신(시 18:24)" 그 날에 면류관을 쓰시고 불멸의 두루마리를 입으신 주님의 얼굴을 보게 되는 것입니다. 이러한 소망이 실현되면 얼마나 큰 풍성함이 임하는지 구약의 선지자는 "주의 얼굴을 뵈오리니 깰 때에 주의 형상으로 만족하리이다(시 17:15)"라고 고백합니다.
당신은 작은 한 알의 포도로부터 얼마나 많은 즙이 나오는지, 작은 불꽃 하나로부터 얼마나 위대한 불길이 일어나는지 아십니까? "마음이 청결한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하나님을 볼 것임이요"란 하나의 작은 쇠조각이 묵상이라는 모루 위에서 망치질을 통해서 어떠한 새로운 모습을 갖추게 되는지 알고 있습니까? 사실 숙련된 전문가의 손 안에 들어가면 그것은 더욱 새로운 모습으로 드러날 수도 있습니다.
나는 "그 우물이 깊다"는 것을 느낍니다. 그럼에도 나는 여전히 무지한 초보자입니다. 그 깊은 우물에서 물 몇 방울만이라도 길어 올려 무언가를 찾아내는 것조차 저에게는 힘에 부칩니다. 비록 영혼에 붙기 시작한 불이 작기는 하지만 간절한 소망이 그 불꽃들을 부채질하면 곧 말씀이 줄 기쁨에 대한 암시를 받게 됩니다. 아직 말씀의 맛을 보는 것은 아니고 깨어진 향유 옥합에서 나오는 향기를 통하여 주는 암시일 뿐입니다. 묵상을 통한 이 암시는 기쁨으로 충만한 마음의 청결함을 경험하는 것이 얼마나 달콤한 것인지 추론하게 합니다. 이런 영적 달콤함을 실현시키기 위해서 묵상은 그것을 간절히 사모하는 열정을 불태웁니다. 그런데 그 달콤함은 자신의 방법으로 찾을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자기 방법으로 찾으면 찾을수록 더 목이 타오릅니다. 그런 방법으로는 영적 달콤함을 경험할 수 없기 때문에 오히려 고통이 됩니다. 그것을 경험하려면 하나님께로부터 오는 지혜를 받아야 합니다. 이 지혜를 통하여 얻게 되는 진리의 깨달음은 영혼을 기쁘게 하며 영혼에 생명을 불어넣어줍니다.
주님은 여러 사람들이 세례를 베풀 수 있도록 직무를 맡기셨습니다. 그러나 세례를 통해 죄를 용서하는 권세는 주님 자신에게 남겨두셨습니다. 그래서 세례 요한이 예수님을 만났을 때 "이분이 세례를 주는 분이시다(요 1:33)"라고 한 것입니다. 우리는 주님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할 수 있습니다. "이분이 우리의 영혼에게 지혜의 달콤함을 주시는 분이시며, 지식을 달콤하게 만들어 주시는 분이시다"고 말입니다. 그는 많은 사람들에게 말씀을 주십니다. 그러나 소수에게만 영혼을 위한 지혜를 주십니다. 이 지혜는 주님을 기쁘시게 하는 자들에게만 할당해 주시는 것입니다.
다음은 구이고의 "수도사들의 사닥다리"에서 기도의 기능에 관한 설명입니다.
묵상을 통해서 영혼은 소망하는 깨달음이나 체험의 달콤함을 스스로 얻을 수 없다는 것을 알게 되지요. 그래서 자신의 마음을 더 낮추게 되고 하나님을 더 높여드리게 됩니다. 스스로 겸손해지면서 다음과 같은 기도에 전념하게 됩니다.
"주님, 마음이 청결해지지 않고서는 주님을 볼 수가 없습니다. 저는 독서를 통해서 묵상을 통해서 무엇이 마음의 청결함인지 진실로 깨닫기를 원했습니다. 또한 어떻게 그 청결함을 이룰 수 있는지 알고자 했습니다. 마음이 청결해져야 저는 조금이라도 주님을 알 수 있게 됩니다. 주님 저는 마음으로 오랜 동안 묵상해왔습니다. 주님의 얼굴을 뵙기를 구하면서 말입니다. 주님 제가 구해왔던 것은 당신의 얼굴입니다. 온종일 저는 묵상을 통하여 주님을 더욱 풍성하게 알기 원하는 소망 즉 열정의 불을 키워왔습니다. 주님은 성경 안에 있는 말씀의 빵조각을 저에게 떼어주시면서 당신의 모습을 보여주셨습니다. 저는 주님을 뵈면 뵐수록 더욱 뵙기를 갈망합니다. 주님은 더 이상 글자란 껍질로 나타나지 않으십니다. 오히려 글자의 의미 속에 숨어 계십니다. 제가 주님 뵙기를 간구하는 것은 저 자신이 잘나서가 아닙니다. 온전히 주님의 자비하심 때문입니다. 다음과 같이 고백하는 여인처럼 보잘 것 없는 저 역시 죄를 고백합니다. "개들도 제 주인의 상에서 떨어지는 부스러기를 먹나이다(마 15:27)" 그러니 저에게도 주님 제가 소망하는 것을 응답하시겠다는 증거를 내려 주시옵소서. 최소한 천상의 비의 한 방울이라도 말입니다. 저의 목마름을 시원케 해줄 그런 빗방울 말입니다. 저는 주님을 향한 사랑에 불타오르고 있습니다."
다음은 구이고의 "수도사들의 사닥다리"에서 관조 또는 조명의 효과에 관한 설명입니다.
영혼은 사랑에 불타는 그런 말들로 주님을 향한 자신의 열정을 불태우며 자신의 처지를 주님께 알립니다. 그러한 사랑의 표현으로 신랑을 간절하게 부르짖으며 찾습니다. 신랑이 되신 주님의 눈은 의로운 자에게 머무릅니다. 그분의 귀는 부르짖는 영혼의 외침 뿐 아니라 그들이 기도하는 깊은 내용까지 듣고 계십니다. 주님은 갈급한 영혼이 하는 말을 다 마칠 때까지 기다리지 않습니다. 오히려 중간에 그 영혼을 만나주기 위해서 달려오십니다. 갑작스럽게 돌파하고 들어와서 영혼을 만나주십니다.
그리고 주님은 천상의 달콤한 이슬을 뿌려주고 가장 귀한 기름을 부어주시며 상한 심령을 회복시켜주십니다. 주님은 영혼의 목마름을 만족시켜주시며 영혼의 배고픔을 채워주십니다. 주님은 세상적인 모든 것들을 잊게 해주십니다. 주님은 영혼이 세상에 대해서는 죽게 하시고 놀라운 방법으로 그 영혼에게 새로운 생명을 부어주십니다. 그리고 주님은 영혼을 천상의 달콤한 이슬에 취하게 하시며 영혼을 깨우쳐주십니다. 몸의 어떤 기능들이 육적인 욕구에 지배당하는 것처럼 영혼 역시 이성의 모든 능력을 마비시키는 육적인 욕구에 지배당할 수가 있습니다. 이렇게 되면 전적으로 육적인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반대로 위와 같이 고양된 관조 또는 조명의 단계에 도달하면 모든 육적인 욕구들은 정복당하게 되고 영혼으로부터 뽑혀나갑니다. 결국 육체가 성령을 거역할 수 없게 되면서 전적으로 영적인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렉찌오 디비나"(Lectio Divina)라는 영성독서를 최초로 체계화시킨 사람은 12세기 수도사였던 구이고 2세입니다. 구이고는 그의 편지인 "수도사들의 사닥다리"를 통해서 깊은 영성에 이르는 네 단계로 독서(Lectio), 묵상(Meditatio), 기도(Oratio), 관조 또는 조명(Contemplatio)를 소개했습니다. 개신교에서는 칼빈(Calvin), 웨슬리(Wesley)로부터 현재는 "이 책을 먹어라(Eat This Book)"라는 책을 쓴 유진 피터슨(Eugene Peterson)에게까지 크게 영향을 끼친 이 영성독서(Lectio Divina)의 기본을 이해하려면 당연히 구이고가 쓴 "수도사들의 사닥다리"를 알아야 할 것입니다. 그래서 본인은 영성독서의 고전인 구이고의 글을 소개하고 있는 중입니다. 지금까지 구이고는 마태복음 5:8절을 가지고 독서의 기능, 묵상의 기능, 기도의 기능, 관조 또는 조명의 효과에 대해서 설명했습니다. 말씀을 읽고 묵상을 통해서 갈급해진 영혼은 기도하게 됩니다. 영혼이 기도를 통해서 깊이 부르짖게 되면 주님께서 만나주시고, 기름을 부어 주시며, 회복시켜주십니다. 이것이 관조 또는 조명의 단계입니다. 다음은 구이고의 글입니다.
"그러면 주님, 주님께서 우리에게 임재하시는 표시가 무엇입니까? 우리의 탄식과 눈물이 주님이 주시는 위로와 기쁨의 증거라고 할 수 있습니까? 만일 그렇다면 여기서 위로라는 말은 아주 새로운 의미로 사용되고 있는 것입니다. 보통 사용하는 세상적인 위로와는 다른 것입니다. 탄식과 연관된 위로나 눈물과 연관된 기쁨은 하늘로부터 넘치도록 흘러내리는 것들입니다. 탄식과 눈물은 겉모습의 순결함을 보여주며 또한 내적으로도 깨끗해졌다는 표시입니다. 마치 유아 세례에서 아기를 물로 씻는 것은 동시에 아이의 마음속을 씻어내는 것을 상징하는 것과 같습니다. 사실 영성독서에서는 그 반대로 이루어집니다. 먼저 마음속이 정결하게 씻어지면서 겉으로 탄식과 눈물이 쏟아져 나오는 것입니다. 이런 눈물은 복된 것입니다. 그 눈물은 우리 속에 들어있는 더러운 것들을 씻어 냅니다. 그 눈물은 우리 안에 타오르는 죄악의 불을 꺼버립니다. 애통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기뻐할 것임이요. 내 영혼아, 애통하면서 너의 신랑을 찾아라. 네가 애타게 기다렸던 주님을 포옹하라. 기쁨의 폭포수에 취하라. 신령한 젖에서 나오는 위로의 꿀과 우유를 마셔라. 네 신랑이 가져다 준 놀라운 상급과 위로는 곧 흐느낌과 눈물이다. 이 눈물들은 주님이 네게 마시라고 권하는 자비로운 잔이다. 이 눈물들이 밤낮으로 너의 빵이 되도록 하라. 인간의 마음을 튼튼하게 해주는 빵, 꿀보다 더 단 빵이 되도록 하라. 주 예수여, 당신을 생각하며, 당신을 기다리며 쏟는 이 눈물들은 너무 달콤합니다. 그런데 우리가 당신을 대면하게 될 때 갖게 될 기쁨은 얼마나 더 달콤하겠습니까? 당신을 위해서 탄식하는 것이 그렇게 달콤하다면, 당신 안에서 기뻐하는 것은 얼마나 더 달콤하겠습니까? 그런데 왜 은밀한 중에 들어야 하는 이런 것들을 입 밖에 내야 합니까? 왜 우리는 언어로 표현할 수 없는 사랑을 일상용어로 표현하려고 합니까? 그런 것들을 체험한 적이 없는 사람들은 그것들을 이해하지 못합니다. 그들은 성경 곧 체험의 책에서만 그런 것들을 아주 분명히 배울 수 있기 때문입니다. 체험의 책에서는 하나님의 은혜가 곧 스승입니다. 그렇지 않고 세상 책들 속에서 그런 것들을 찾으려고 하는 것은 아무 소용없는 짓입니다. 마음 속 깊은 의미를 드러내는 해설이 없다면 문자적인 의미를 연구한다는 것은 무의미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