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음의 시작
일자: 2020-02-16 | 본문: 마가복음 1:1-11
1. 말씀 기도(다같이):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의 시작이라” 예수님, 우리는 생활 속에서 많은 것을 시작합니다. 그 모든 시작이 나 혼자의 생각이나 계획으로만 시작되지 않게 하여주시옵소서. 마가복음의 시작이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하는 것처럼 우리의 모든 시작도 예수님과 함께하는 시작이 되게 하시옵소서. 마가복음의 시작이 “복음” 즉 복된 말씀으로 시작하는 것처럼 우리의 모든 시작도 하나님의 축복된 말씀으로 시작하게 하시옵소서. 새해 2020년을 시작한지도 벌써 한 달이 지났습니다. 우리의 새해 출발이 예수님과 함께 하고 있는지 점검하게 하시고 또한 하나님의 축복된 말씀으로 시작하고 있는지 점검하게 하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리옵나이다. 아멘.
2. 마음열기: 우리는 살아가면서 많은 것들을 새롭게 시작합니다. 최근에 새롭게 시작한 일이 있다면 무엇이 있나요?
인도자는 위에 질문을 하면서 새롭게 시작하면서 어떤 것이 힘들고 또는 어떤 것이 좋은지를 함께 나누는 시간을 가집니다. 신앙적인 질문이라기보다는 생활 속에서 일어나는 새로운 시작을 묻는 질문이지요. 마음을 열기 위해서 던지는 질문입니다. 사실 공과 제목인 “복음의 시작”과도 연관이 있는 질문이지요.#### "마음 열기"는 일반적으로 Icebreaker 시간으로 속도원들의 마음을 열 수 있도록 분위기를 바꾸는 것을 목적으로 한다. "마음 열기" 시간이 생각보다 길어지면 인도자는 시작하기 전에 제한 시간을 알려주는 방법을 취할 수 있다. 예를 들면 “"마음 열기" 시간은 15분 정도로 합시다”라고 말하고 시작한다. "마음 열기"의 질문은 제목에 연관된 것으로서 인도자는 전체 내용을 숙지하고 “마음 열기”의 대화 내용을 이끌어가지 않으면 대화가 다른 방향으로 빠질 수 있다. 속회를 인도하다보면 분위기가 차가워서 진행하기 어려울 수 있기 때문에 “마음 열기”를 통하여 분위기를 따뜻하게 하면 이후 진행이 매끄러워질 수 있다.
3. 찬양하기(찬송가):
4. 본문읽기(인도자): 마가복음 1:1-11절을 함께 읽습니다.
5. 본문 이해:
본문 1절에 기록된 복음의 원문은 “유앙겔리온”입니다. “승리의 기쁜 소식”을 뜻합니다. 마가복음서의 시작은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의 시작”이라는 문장으로 시작합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땅에 오신 것 자체가 기쁜 소식입니다. 그분이 오심으로 말미암아 죄에 붙잡혀 죽을 수밖에 없는 인류에게 구원의 길이 열린 것이기 때문이지요. 몸소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심으로 영생의 문을 열어놓으셨습니다.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 자체가 복음이라는 의미입니다.
또한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이라는 구절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땅에 복음을 가지고 오셨다는 의미도 됩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가르치시고 선포하시고 행하시고 보여주신 모든 것들이 곧 우리 인류를 살리는 승리의 기쁜 소식이라는 것이지요. 예수께서 귀신을 제어하시고, 사탄을 이기시고, 죄를 이기시고, 죽음을 이기셨습니다. 승리하심으로 승리의 기쁜 소식을 우리에게 알려주셨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은 믿는 모든 크리스천들에게 영적 전투에서 승리의 기쁨을 약속하십니다. 비록 남들이 볼 때 패배할 것 같은 운명이라 할지라도 복음이신 그리스도를 통하여 다시 일어나고 회복되며 승리할 것을 믿는 사람들이 크리스천입니다.
예수님이 오시기 700년 전에 선지자 이사야가 살았습니다. 본문을 보면 이사야는 천상의 세계를 체험합니다. 즉 성부 하나님과 성자 예수님 사이의 대화를 들었던 것이지요. 그 내용이 본문 2절에 기록되어 있는 것입니다. 본문에 나는 하나님이시고 사자는 세례 요한이며 대화의 상대는 예수님이십니다. 풀어보면 하나님께서 세례 요한은 예수님 앞에 먼저 보내노니 세례 요한이 예수님의 길을 준비하게 될 것이란 말입니다. 하나님은 이사야 선지자를 통하여 예수님을 이 땅에 보내실 것이며 또한 그에 앞서 세례요한을 보낼 것이라고 예언하셨습니다.
하나님의 예언은 약속입니다. 하나님은 약속을 반드시 이루십니다. 이사야 선지자는 하나님의 예언을 알고 구약 성경에 기록해 놓았습니다. 그러고 나서 약 700년 후에 드디어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셨다는 것을 선포하는 구절이 바로 앞에 1절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의 시작”이라는 말씀입니다. 구약 성경에서 예언되었던 예수님이 신약 성경에서 실현되었습니다.
하나님은 갑자기 일을 벌이시는 분이 아닙니다. 미리미리 예언자와 같은 사람들을 통해서 약속 즉 예고를 하십니다. 그리고 때가 되면 그 약속을 반드시 성취하십니다. 크리스천은 하나님의 약속의 말씀은 반드시 이루어진다는 것을 믿는 사람들입니다. 성경 말씀은 우리에게 주신 하나님의 약속의 말씀입니다. 미리 약속하신 예언의 말씀은 반드시 실현됩니다.
다음과 같은 하나님의 약속의 말씀을 믿고 있는 크리스천이라면 이 말씀이 반드시 우리의 삶 속에서 이루어질 것입니다. (수 1:5) 너의 평생에 너를 능히 당할 자 없으리니 내가 모세와 함께 있던 것같이 너와 함께 있을 것임이라 내가 너를 떠나지 아니하며 버리지 아니하리니 (수 1:7) 오직 너는 마음을 강하게 하고 극히 담대히 하여 나의 종 모세가 네게 명한 율법을 다 지켜 행하고 좌로나 우로나 치우치지 말라 그리하면 어디로 가든지 형통하리니
본 3절도 선지자 이사야의 예언의 말씀입니다. 2절에서 이사야가 천상의 세계를 체험했다는 것은 공간을 초월해서 영적 체험을 한 것이지요. 그런데 본 3절에서는 시간을 초월해서 영적체험을 합니다. 이제 이사야는 그로부터 약 700년 후에 유대 광야에 나타날 세례요한을 보게 됩니다. 광야의 외치는 자의 소리는 곧 세례 요한이 요단 광야에서 말씀을 선포하는 모습을 말합니다.
세례 요한의 선포 내용은 곧 하나님의 아들 예수님께서 오실 터이니 그를 영접할 준비를 하라는 것이지요. 또한 예수님께서 편하게 오시도록 오시는 길을 곧게 하라는 것입니다. 세례 요한의 사명은 예수님의 앞길을 준비하는 것입니다.
세례 요한은 광야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외쳤습니다. 사실 이 세상은 광야와 같이 거칠고 삭막합니다. 생명들이 살아남기 위해서 몸부림치는 장소가 광야입니다. 광야에는 물도 없고 길도 없습니다. 생명보다는 죽음이 더 가까운 땅이지요. 이런 죽음의 땅에서 세례 요한은 하나님의 소리를 외쳤습니다. 그 소리는 광야에서 방황하는 인생들을 구원으로 또는 생명으로 인도하는 소리였습니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그러면 너희 마음이 쉼을 얻으리니(마 11:28-29)” 광야 같은 거친 세상에서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순종하면 쉼과 회복을 얻을 수 있습니다.
세례 요한은 요단강에서 사람들에게 세례를 주면서 하나님의 말씀을 외쳤습니다. 문제는 세례만 받으면 천국에 갈 수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요한을 찾아와 세례를 받으려고 했습니다. 누가복음을 보면 이때 세례 요한이 그 사람들을 향하여 “독사의 자식들”이라며 꾸짖었음을 읽을 수 있습니다. “요한이 세례받으러 나오는 무리에게 이르되 독사의 자식들아 누가 너희를 가르쳐 장차 올 진노를 피하라 하더냐 (눅 3:8) 그러므로 회개에 합당한 열매를 맺고(눅 3:7-8)”
하나님의 사람은 폼 잡는 데에 있는 것이 아니라 열매 맺는 데에 그 가치가 있습니다. 즉 회개에 합당한 열매를 맺는 것이지요. 교회 나와 찬양하며 기도하며 말씀 듣는 것은 크리스천으로서의 생활에 중요합니다. 그러나 더 중요한 것은 하나님의 능력을 깨닫고 우리의 잘못을 고쳐나가는 것입니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의미 없는 단순한 주문 소리가 아닙니다. 우리에게 징정으로 필요한 것은 우리의 마음과 행동을 변화시키는 광야에 외치는 소리 곧 하나님의 말씀이다. 이 소리는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았습니다. 세례 요한은 헤롯 왕 면전에서 왕의 죄를 고발했습니다. 요한은 상황에 굽히지 않는 사람이었습니다. 어떤 상황에서도 흔들리지 않는 사람이었습니다. 이와 같은 광야에 외치는 소리가 참으로 하나님의 길을 굽게 할 수 있습니다. 이런 광야의 소리는 굳어진 마음을 부수는 참 능력이 있습니다. 즉 소리는 사람을 회개하게 합니다. 회개 한다는 것은 굳어진 마음이 부서졌다는 것입니다. 광야의 외치는 소리는 광야를 하나님의 나라로 변화시킵니다.
본문 5절을 보면 광야의 외치는 소리를 듣고 사람들은 자기 죄를 자복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백성이 된 것이지요. 사도행전에 보면 베드로가 외치는 소리를 듣고 사람들은 마음에 찔려 우리가 어찌할꼬 하고 회개하였습니다. “이 말을 듣고 마음에 찔려 베드로와 다른 사도들에게 물어 이르되 형제들아 우리가 어찌할꼬 하거늘(행 2:37)”
세례 요한의 광야에 외치는 소리를 듣고 전혀 다른 반응을 한 사람이 있습니다. 세례 요한이 헤롯 왕 앞에 섰을 때 요한은 헤롯의 죄를 지적했습니다. 헤롯은 분명 요한의 말을 들었다. “헤롯이 요한을 의롭고 거룩한 사람으로 알고 두려워하여 보호하며 또 그의 말을 들을 때에 크게 번민을 느끼면서도 달게 들음이러라.(막 6:20)” 그런데 헤롯에게는 회개가 없었습니다. 오히려 나중에 헤롯은 요한을 죽였습니다. 헤롯은 요한의 외치는 소리가 옳은 것인 줄을 알았지만 그의 삶이 변화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의 음성을 두려워하긴 했지만 헤롯은 자신의 죄를 회개하지 않았습니다.
우리는 결단해야 합니다. 회개를 할 것인가 아니면 하나님의 소리를 죽일 것인가 말입니다. 하나님의 소리는 우리의 마음을 뚫고 들어오는 힘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소리가 여러분의 속을 벗겨내는 아픔을 느끼지 않습니까? 그 아픔 고통 때문에 헤롯 왕처럼 광야에 외치는 소리를 죽이는 사람이 되지 마십시오. 병을 고치려면 아픔을 감수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구원을 받으려면 아픔을 감수해야 합니다. 회개를 위해서는 고통이 수반됩니다. “마음에 찔려 우리가 어찌할꼬”하며 말입니다.
세례 요한은 부드러운 옷(마 11:8)이 아닌 낙타의 털로 만든 거친 옷을 입었습니다. 그리고 가죽으로 만든 허리띠를 띠었습니다. 이러한 요한의 복장은 당시 사람들의 눈에 두 가지 의미를 부여합니다. 첫째는 금욕 생활입니다. 당시 종교 지도자들은 생활의 안락함을 추구하였습니다. 당시 도시 사람들도 온갖 화려함을 추구하고 있었지요. 이런 분위기 속에서 세례 요한의 단순한 복장은 그 자체가 충격적인 메시지가 됩니다. 그러나 마태복음에서 요한의 관심은 복장이나 식사에 있는 것이 아니라 광야의 외치는 “소리”의 사명을 충실하게 감당하는 것에 있었습니다. 즉 자신의 외모보다는 말씀 선포가 그의 삶의 중심이었습니다. 둘째는 요한은 자신의 모습을 통하여 돌아온 엘리야를 연상케 했습니다. 헬라어 구약성경(LXX) 열왕기상 19:19절에 의하면 엘리야의 겉옷은 양가죽으로 만든 것이었습니다. 열왕기하 1:8절에 의하면 엘리야는 털이 많은 사람이고 허리에 가죽 띠를 띠었습니다. 결국 요한의 복장은 엘리야와 같은 모습이었습니다(왕하 1:8, 슥 13:4). 구약에 엘리야는 죽지 않고 불 수레를 타고 승천하였기 때문에(왕하 2:11-12) 엘리야는 여전히 살아 있고 백성들이 위기에 처했을 때 하나님을 위하여 활동할 준비가 되어있다고 믿었습니다. 예언자 말라기는 종말 때가 되면 이 엘리야가 다시 나타날 것이라고 예언했습니다(말 4:5-6). 요한은 엘리야와 같은 복장을 함으로서 자신이 기다리던 엘리야이고 지금이 바로 종말임을 알리고 있는 것입니다.
메뚜기와 석청: 요한이 금욕주의자처럼 생활을 하였습니다. 본 구절에 의하면 요한의 주식은 메뚜기와 석청이었습니다. 요한이 메뚜기 종류를 먹고 살았다는 것은 쉽게 받아들일 수 있습니다. 율법에 의하면 메뚜기는 먹을 수 있는 깨끗한 곤충이었습니다(레 11:21이하). 요한 당시에는 근동 지역이나 중동 지역 아랍 사람들이 먹었던 일반 음식이 메뚜기였습니다. 메뚜기는 비타민 함유량은 매우 높기 때문에 당시 사람들에게 중요한 음식이었습니다. “석청”은 직역하면 “야생 꿀”을 가리킵니다. 요한이 입었던 옷도 주위에서 쉽게 구할 수 있는 낙타 털옷이고 음식도 주위에 널려있는 메뚜기라고 하면 여기서 언급된 꿀도 주위에서 쉽게 구할 수 있는 “야생 꿀”이 더욱 설득력이 있습니다.
우리는 그리스도를 따르는 사람들입니다. 그리스도가 우리의 목자입니다. 우리가 약한 이유는 그리스도 없이 스스로 해보려고 하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방황하는 이유는 그리스도의 인도함 없이 스스로 가려고 하기 때문입니다. 우리 자신의 고집을 버리고 그리스도를 의지해야 합니다. 그러면 전현 다른 힘을 경험할 것입니다.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영적인 힘을 경험할 것입니다.
구속사 관점에서 볼 때 첫 사람 아담은 그의 죄를 통하여 하늘을 닫았고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의를 이룸으로 말미암아 닫혔던 하늘을 다시 열었습니다. 그리스도에 의해 처음으로 다시 열려진 하늘은 마태 교인들에게도 여전히 열려 있고 현재도 하나님의 의를 이루고자 순종하는 사람들에게 여전히 열려 있습니다. “하늘이 열린다”는 것은 계시록 4:1절이나 에스겔 1:1절처럼 계시적 사건입니다. 하늘이 열림으로 하늘과 땅 사이를 연결하는 새로운 통로가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이 통로를 통하여 계시를 받은 사람은 하나님의 신비에 접근할 수 있습니다. 또한 이 통로를 통하여 본 구절처럼 하늘에서 성령이 지상에 내려와 거할 수 있습니다.
사복음서 모두 예수께서 세례 받을 때 있었던 성령의 임재를 기록하고 있습니다. 본 절에서는 성령의 내려오심을 비둘기가 내려오는 것에 비유하고 있습니다. 유대 문학들을 보면 비둘기를 지혜나 이스라엘에 대한 상징으로 사용된 경우는 볼 수 있지만 성령 또는 하나님의 영을 비유로 사용한 경우는 많지 않습니다. 본 구절에 의하면 성령이 예수 위에 비둘기 같이 임했습니다. 출애굽 시대에는 하나님의 신이 구름 가운데 이스라엘 위에 임했습니다(민 9:22, 11:25, 사 19:1). 이사야 60:8절을 보면 구름이 임하는 것과 비둘기가 임하는 것이 같이 표현됩니다. 그렇다면 비둘기도 출애굽 때에 이스라엘을 보호해주고 인도해주던 구름과 같은 역할을 하는 것으로 이해할 수도 있습니다. 더 나아가서 성령께서 태초에 우주와 생명을 창조하기 위해 최초의 물 위를 비둘기처럼 떠돌아다녔습니다. 이 성령이 예수의 세례 때에 비둘기처럼 임하여 곧 이루어질 새 출애굽과 새 창조를 암시하고 있는 것입니다. 마태는 성령의 강림하심이 비둘기가 내려오는 것에 비교하고 있습니다. 즉 비둘기처럼 부드럽게 내려오는 것을 가리키는 말입니다. 앞 절에 있는 심판의 표현처럼 나무꾼이 도끼로 찍어 내리는 모양도 아니고, 불이 이글거리며 타오르는 모양도 아니고, 회오리 바람처럼 부수는 모양도 아닌 비둘기처럼 부드럽게 성령이 예수에게 임한 것입니다.
비둘기 같이 성령이 내려오는 것은 메시야의 기름부음과 관계가 있습니다. 본래 “그리스도” 또는 “메시야” 모두 “기름부음 받은 자”란 의미가 있습니다. 본 구절에 성령이 예수 위에 비둘기처럼 부드럽게 내려오는 것은 구약에서 기름을 머리 위에 부어 흘러내리는 것에 비유할 수 있습니다. 즉 성령의 기름부음 받는 그리스도의 모습입니다. 사실 사도행전 10:38절을 보면 예수는 성령에 의해 기름부음 받았다고 합니다. 구약에 보면 왕들이 기름부음을 받았습니다(삼상 10:1, 16:13). 본 구절에서 세례 받을 때에 예수의 머리 위로 내려왔던 성령은 새 시대의 왕으로 임명받는 기름부음이 될 수도 있습니다. 이미 구약의 이사야는 메시야에게 하나님의 신 즉 성령이 강림할 것임을 예언하였습니다(사 11:2, 42:1). 세례 때에 임한 성령 사건은 예수의 생애에 중요한 전환점이 됩니다. 세례를 받은 후부터 공식적으로 세상을 구원하기 위한 사역이 시작되는 것입니다. 세례를 통하여 성령의 기름부음을 받고 새로운 시대에 하나님 나라의 새 왕으로 등극하는 것입니다. 새 왕이 되면서 성령을 통하여 신적인 왕권을 받습니다. 이런 권능으로 그리스도이신 예수는 사탄의 세력을 쳐부수고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나라가 이미 임했음을 선포합니다.
예수의 세례 때에 성령이 임하신 것은 이후에 온 교회에 성령을 보내실 것을 예고하는 것입니다. 누가복음 3:21절 이하에 보면 예수께서 세례를 받으시고 기도하실 때에 성령이 임하였습니다. 이후에 초대 크리스챤들도 함께 모여 기도할 때에 성령이 임하였습니다(행 2:4, 4:31). 초대 크리스챤들은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시작된 새 시대 즉 마지막 때에 하나님으로부터 택하심을 받은 새로운 이스라엘 백성들입니다. 이런 점에서 예수의 세례는 종말론적 의미를 지닙니다. 예수의 세례는 새 이스라엘인 온 교회에게 성령을 부으심에 대한 예고가 됩니다.
앞에 “하늘들이 그에게 열렸다”는 구절에서 논의한 것처럼 본 단어도 예수의 개인적인 체험을 가리키고 있습니다. “보시더니”에 해당하는 헬라어 ei\den(에이덴)을 번역하면 “그가 보았다”가 됩니다. 성령이 비둘기 같이 내려 임하는 것을 본 사람은 예수 한 사람뿐이란 것입니다. 또한 ei\den(에이덴)이란 단어는 눈으로 직접 “본다”는 의미 외에도 “안다, 이해한다”란 의미도 있습니다. 그렇다면 본 단어는 성령이 자기 위에 임하는 것을 “그 자신이 알았다” 또는 “그 자신이 깨달았다”란 의미로도 해석할 수 있습니다. 어떤 경우든지 성령이 비둘기 같이 임하는 것을 체험한 사람은 세례 받을 때에 주변에 있는 사람들이 아니라 세례 받는 당사자 예수뿐이라는 말입니다. 성령의 개인적인 체험을 언급하는 말입니다. 이것은 마태 교회 내에 교인들에게 성령이 개인적으로 체험될 수 있다는 것을 암시합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은 하나님 이름에 대한 경외심 때문에 “하나님”이란 이름을 직접 쓰는 것을 회피하고 대신에 “하늘”을 사용했습니다. 그래서 여기서 하늘은 하나님을 가리키는 것으로 볼 수 있고 “하늘로부터 오는 소리”는 곧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소리”를 가리킵니다. 신약은 하늘에서 내려온 소리에 대해 자주 기록하고 있습니다. 예수께서 변화산에 있을 때에 하늘에서 소리가 들렸습니다(마 17:5). 예수께서 기도하실 때(요 12:28), 베드로가 기도하려고 지붕 위에 있을 때(행 10:13, 15, 11:7, 9), 바울이 다메섹 도상에 있을 때(행 9:4, 22:7이하) 하늘에서 소리가 났습니다. 랍비 문학을 보면 하나님은 계시의 수단으로 소리를 통하여 말씀하십니다. 예수께서 세례 받으실 때에 들려온 소리는 아들을 향한 사랑과 기쁨을 표현하는 소리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사랑이며 기쁨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어느 누구도 예수를 거부하고 동시에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없습니다. 예수는 많은 예언자들 중에 한 예언자가 아니고 하나님의 궁극적인 계시입니다. 하나님의 사랑과 기쁨이 되는 예수를 십자가에서 돌아가시게 한 것은 우리를 구원하기 위한 하나님의 희생이 얼마나 큰지를 보여주는 표현이기도 합니다.
세례 때에 들려온 이 목소리는 예수의 신분을 공표하기 위한 하나님의 음성인 것입니다. 이 음성을 통하여 예수는 하나님이 사랑하시는 아들임이 드러났습니다. 예수께서 세례 받을 때에 선포된 본 구절은 메시야로 사역을 시작할 하나님의 아들을 공식적으로 소개하는 것입니다. 마가복음이나 누가복음에서는 예수께서 세례 받을 때에 “너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막 1:11, 눅 3:22). 이것은 하나님께서 예수를 향하여 직접 하신 말씀으로 마치 예수 혼자서 이 하늘의 소리를 들은 것으로 생각할 수 있습니다.
“내 아들이라”란 본 구절을 기록할 때에 메시야에 대한 예언이 기록된 시편 2편을 염두에 두었을 것입니다. 예수께서 세례 받을 때에 일어났던 성령 임함과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자”란 선포는 이사야 42:1절을 연상케 합니다. 이 아들은 이미 구약 예언자들을 통하여 예언되었던 메시야 즉 그리스도입니다. 본문에서 예수를 하나님 아들로 인정한 것은 바로 하나님 자신이라고 밝힙니다. 하나님이 인정한 당신의 아들을 사람이 의심하거나 부인할 수 없습니다. 본문의 표현대로 하나님의 사랑이요 기쁨인 예수를 무시하고 하나님을 사랑하거나 기쁘시게 할 수 없습니다. 교인들의 신앙의 시작도 예수는 하나님의 아들임을 고백함으로 시작되어야 합니다.